시라노라는 명작을, 자칭 뮤덕인 친구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접했다. 자칫 이 작품이 플롯의 인과만 또렷한 ‘드라마적 재현’으로 환원되면, 관객은 거의 자동적으로 시라노의 시선을 상속받은 청자가 된다. 그러면 록산은 답답한 오독의 대상이 되고, 크리스티앙은 미움 쪽으로 기울기 쉽다. 한 사람의 진심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빌려 유통되는 구조 자체가, 관객에게 성급한 판결을 유도하니까.
그런데 이지수의 록산은 그 단선적인 심판을 유예한다. 특유의 청아함이 단순한 ‘예쁜 소리’가 아니라, 첫사랑의 무구함과 잔혹함을 동시에 비추는 투명한 매질처럼 작동한다. 그래서 록산은 어리석음의 표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각의 무죄함으로 설득된다. 어떤 순간에는 정말로 영화 건축학개론의 수지처럼관객이 이유를 따지기 전에 마음부터 내어주게 만드는 얼굴과 결이 있었다.
임준혁의 크리스티앙도 인상적이었다. 과잉된 선악 구도로 관객의 반감을 끌어내기보다, 담백한 연기 톤으로 사건의 초점을 “인간의 죄악과 충돌”이 아니라 “상황이 구축한 비가역적 비극”으로 이동시킨다. 덕분에 크리스티앙은 빌런이 아니라, 시라노와 같은 구조 안에서 소모되는 비극의 당사자로 읽힌다. 미움의 방향이 인물에게 붙지 않고, 운명과 조건의 잔인함 쪽으로 정교하게 옮겨간다.
그리고... 쌀라노는 어마어마하다. 넘버를 잘 처리하는 차원을 넘어, 언어의 리듬으로 장면의 기류를 재배치한다. 호흡 하나, 발화 하나가 정동의 밀도를 층층이 적층하고, 결정적 순간에 정밀하게 관통시킨다. 이 작품이 결국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언어로 사랑을 대체하며 살아낸 삶”에 대한 비가라는 사실을, 무대 위에서 끝까지 증명해버리는 타입이다.
노년의 시라노는 물론 젊을 때보다 엉성한 몸짓, 갈라지는 목소리로 마지막 움직임을 보이지만, 전달하는 메시지는 오히려 더 탄탄해진다. 기술이 매끈해지지 않아도 되는 지점, 곧 삶의 시간과 상실이 문장에 중력을 부여하는 지점이 도달한다. 무너지면서 단단해지는 역설이 있고, 그게 관객을 더 깊게 붙잡는다. 그 장면을 보고 난 뒤부터는, 마치 큰 코를 지닌 누군가를 볼 때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는 눈물을 짓는다. 이유를 설명하기도 전에 감정이 먼저 반응한다. 시라노의 마지막이, 내 안에 어떤 조건반사로 남아버렸기 때문이다